- 이 글은 <발타사르의 신학 세계를 탐험하다> 시리즈의 아티클로, ‘발타사르, 그가 세상을 보는 시선’에서 이어집니다.
체크 포인트!
📚 이 글,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난이도: ★★★☆
- 신학·철학·예술의 연결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추천!
- 현대 사회의 정신적 위기와 신학의 역할을 고민해본다면 더욱 좋습니다.
📝 읽고 나면 얻을 수 있는 것!
- 계몽주의에 대한 발타사르의 비판적 분석
-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잇는 ‘신학적 미학’의 관점
- 현대 사회의 영적 결핍과 그 대안에 대한 신학자의 제안
- ‘아름다움’이 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통찰
🔎 ‘양날의 검’ 계몽주의
발타사르는 자신이 살아온 19~20세기에 대해 역설적인 평가를 내린다. 바로, 그의 시대는 지성적으로는 가장 풍요롭지만, 그리스도교는 영적인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계몽주의’가 있다. 계몽주의란, 인간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믿음이다. 이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대한 낙관론적 기대이기도 하다.
발타사르는 계몽주의로 인해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무시당하고, 그 때문에 비극적인 아픔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계몽주의가 인류 모두에게 진보된 문명을 가져다 주리라 기대하는 맹목적인 믿음을 꼬집는다. 무엇보다 계몽주의는 그리스도교에게 자연과학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신학과 성경 연구의 가치를 폄하한다. 발타사르의 설명은 이러하다.
오늘날 우리는 자연과학과 성경을 대치시켜 어떠한 이해도 얻어낼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간과한다. 하느님께서 추구하는 가치와 목적은 인간에게 자연과학적인 가르침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과 신학이 가진 가치를 무의미하게 치부하면 안 된다.
이 설명은 명쾌한 답을 포함한다. 계몽주의를 중심으로 발전한 자연과학의 척도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는 이미 다른 관점에서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그 기준으로 그리스도교를 재단하고, 무의미하다고 평가절하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 하느님 현존과 함께 존재하는 ‘희망’
계몽주의의 그늘 아래에서도 발타사르는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에 대해 역설한다. 세상과 그리스도교의 시선이 엇갈리는 시대라고 할지라도, 창조주 하느님의 현존과 섭리에 대한 성찰의 기회는 꺼지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이 어려움 속에서도 해결책을 찾기 위해 희망을 쫓고 있다.
다시 말해, 현대 사회는 인본주의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어느 때보다 높은 삶의 질을 누리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영에 대한 결핍’이 존재한다. 현대인들은 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 또 다른 형태의 영성을 모색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발타사르는 영적인 세계가 존재하는 사실이 인식되고 있음은 긍정적이지만, 그 영의 결핍이 지속되는 현상 또한 간과할 수 없으며 이 상반된 형태가 거듭해서 반복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더 나아가 그는 스스로의 분석에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첫째. 고대 철학으로 회귀하여 형이상학적 사색을 해야 하는 노력
둘째. 태초부터 스스로의 정체를 서서히 드러내 내면으로 이끄는 하느님께 대한 미학적 사색의 필요
발타사르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하느님 영광에 대한 체험’과 그 목격이라고 주장한다. 이 체험과 목격은 현대 시대를 살아가는 사상가들이 꾸준히 노력해야 하는 ‘고대 전통에서 철학을 재발견하려는 시도’를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이 시도는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 초월적 미학과 맞닿아 있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인식하여 형성되는 ‘그리스도교와 허무주의 사이에서 결정되는 단순한 구성’이다.
인간 스스로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절대자를 지향하는 인간의 노력은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 중심으로의 전환’이라는 시류와 함께 이 ‘이어짐’은 단절되고, 형이상학적 사색 등 고대 철학이 갖고 있는 여러 긍정적인 요소들도 힘을 잃었다. 발타사르는 이처럼 ‘하느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 관점으로의 전환’이 가져온 부정적 현상들을 ‘형이상학의 인간학화’라고 표현한다.
🔎 신성함이 가진 아름다움
발타사르의 문학적 소재인 선(bonum)과 아름다움(pulchrum)은 신학적인 성찰로 확대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어렵지 않은 과정을 통해 ‘영광과 아름다움이 일치’하는 사실을 발견한다.
“마치 아름다움은 선이 화려하게 빛나는 모습으로, 세상은 하느님의 모습처럼 광채가 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영적 생명체는 아름다움의 기적과 영원한 선의 은총 안에서 보이기 위해 창조되었고, 이러한 방식의 영의 진정한 움직임은 성찰과 사랑으로 융합된다.”
‘아름다움(pulchrum)’은 하느님의 영광의 신비, 그 비밀스러움과 신성함의 현현을 통한 성찰의 시작점이다. 발타사르에게 아름다움은 모든 것의 시작이고, 인간의 지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마지막 단어이며, ‘진리(verum)’와 ‘선(bonum)’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 인간학적 전환 ‘신학적 미학’
이처럼 발타사르의 신학적 사색은 앞서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인싸? 아니 아싸!’에서 말했듯이 초월론적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미학’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아름다움’과 ‘선’ 등의 형이상학적 관점을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 ‘인간학적 전환’을 시도한다. 그의 비판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현시대의 종교에서조차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고,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름다움’은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는 큰 힘을 발휘한다.
발타사르는 아름다움(진선미)에 대한 인간의 지향을 간직한 ‘신학적 미학’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현대를 진단한다. 이 시대는 종교성을 상실했고, 현대인들은 신에 대해 무감각하다. 이런 시대 속에서 인간 각자가 삶 속에서 하느님을 인식하고, 체험하면서 시작하는 드라마는 현시대 ‘죽어 버린 하느님’에 대해 성찰하게 하고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데 느껴지는 것’들까지도 다 알아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것들은 없어도 살 수 있는가?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사랑’, ‘미움’, ‘행복’ 등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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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에 계속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