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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달콤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 사이, 👿 우리의 마음은 왜 운세 같은 미신으로 향하는 걸까요?
✟ 오늘의 글은 세례와 회개,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하느님 앞에 다시 ‘알몸’으로 서는 용기를 지니고, ‘믿음’의 길을 따라 함께 걸어 볼까요?🚶🚶 |
세례, 자신의 세계관을 통째로 떠나는 결심
4세기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교회에 들어오고자 한다면, 그는 오늘날의 입교 단계와 기간보다 더 길고 더 강렬하며 더 극적인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신자들의 눈에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오는 요소는 아마도 ‘마귀를 끊어 버리는 선언’일 것이다.
현행 세례 전례에서 세례 샘 축복이 끝난 다음, 주례자는 세례 후보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여러분은 마귀와, 마귀의 모든 행실과, 마귀의 모든 유혹을 끊어 버립니까?”
이와 비슷한 다른 표현으로 묻기도 한다.
“여러분은 …… 죄를 끊어 버립니까? 악의 유혹을 끊어 버립니까? 죄의 근원인 마귀를 끊어 버립니까?” (한국 교구들에서는 문화적인 상황 때문에 “온갖 미신 행위를 끊어 버립니까?”라는 질문이 추가된다.)
오늘날에는 마귀를 끊어 버리는 이 선언이 한두 번, 많아야 서너 번의 질문과 대답으로 마무리되지만, 고대 교회에서는 여러 동작과 자세를 통해 세례받기 전, 자신이 딛고 서 있던 세계관을 통째로 떠난다는 결심을 드러냈다.
서쪽으로 몸을 돌려 옛 삶과의 관계를 끊다
먼저 세례 후보자는 일몰과 어둠이 찾아드는 방향, 즉 죄와 죽음의 지배를 상징하는 서쪽으로 몸을 돌려 마귀(사탄)와 마귀의 허례허식과 죄를 끊어 버린다고 선언했다. 때로는 완전한 절연을 드러내고자 침을 뱉기도 했다.
여기서 마귀의 ‘허례허식’이란 겉만 번지르르한 법식의 수준을 넘어, 미신으로 가득한 고대의 다신 숭배, 야수들을 풀어 놓고 사람의 사지를 갈가리 찢는 광경을 즐기던 고대 극장의 비인간적 풍속을 가리킨다.
따라서 세례 후보자가 끊어 버린다고 선언한 것은 단순한 개인의 죄가 아니라, 힘에 대한 숭배와 탐욕, 거짓과 미신, 인간 존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함으로 사람을 옥죄는 올가미 같은 문화 전체였다.
그리스도를 입기 전, 먼저 벗어야 하는 것
세례 후보자는 이 결심과 선언을 더욱 확고히 드러내고자 옷을 완전히 벗고 장신구 일체를 내려놓았다. 하느님의 자녀가 하느님 앞에서 입을 수 없는 낡은 습속의 옷은 벗어 던져야 했기 때문이다(인생의 경사 가운데 하나로 여겨 좋은 옷을 입고 예쁘게 꾸민 채 세례받는 오늘날과는 얼마나 다른 모습인가).
후보자가 벗는 옷은 바오로 사도가 “육의 행실”이라고 부른 생활을 뜻했다.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갈라 5,19-21)
이것이 바로 세례받으려는 이가 벗어야 할 죄와 죽음의 옷이었고, 그 옷을 벗어야만 비로소 그리스도를 입을 수 있었다(갈라 3,27 참조).
오늘날에는 상상할 수 없는 옛 예식
목욕탕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공연하게 옷을 전부 벗는다니(물론 남녀는 분리되어 세례받았고, 여자 후보자는 여자 봉사자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개인의 품위와 사생활 보호가 가장 큰 이유겠으나, 핵심 예식인 물과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세례만을 중시하고, 다른 요소들은 가능한 생략하거나 빠르게 마무리하려는 오늘날의 풍조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죄를 벗어 던지고, 죽음을 씻어 내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회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기존의 생활 태도나 습속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것들은 옷을 넘어, 피부와 장기, 세포에까지 들러붙는 것만 같았을 것이다. 벗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살갗까지 벗겨 낼 기세로 옷을 벗지 않았을까? 그러나 마귀를 끊어 버린다는 선언만으로는 부족했다.
세례 자체도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올라오는 침수 방식으로 이루어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새 정체성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옛 생활에 스며든 죄와 죽음의 찌꺼기는 물로 씻어 내는 정도로는 부족하고, 아예 물속에서 죽어 물 밖에서 다시 태어나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를 꺾지 않으려고 ‘긍정적인 마음’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내면 깊이 스며든 부정적인 마음을 애써 외면하려는 우리보다, 오히려 훨씬 오래전에 살았던 저들이 인간에 대해 더 현실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길 잃은 ‘하느님의 어린양’ 찾기
바로 그 현실적인 감각이 교회 안에서 세례 후에 지은 죄의 용서라는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세례로 모든 옛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된 이들 또한 얼마든지 다시 죄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례가 “원죄를 없애고 인간을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지만, 약해지고 악으로 기우는 인간 본성에 미친 결과는 인간 안에 집요하게 남아서”(《가톨릭 교회 교리서》 405항) 인간을 끊임없이 죄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했다.
2세기 중엽에 등장해서 오늘날의 고해성사로 이어져 온 교회의 참회와 화해 제도는, 인간의 근본적인 나약함과 불안 때문에 죄를 지어 하느님과 교회에서 멀어진 이들을 다시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데려오려는, 일종의 거대한 ‘길 잃은 어린양 찾기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자를 뒤흔드는 두 가지 힘, 달콤함과 불안
세례받은 신자가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죄를 짓게 되는 데는 두 가지 요인이 함께 작용한다. 하나는 죄의 확실하고 달콤한 맛이다. 죄에는 크든 작든, 겉으로 드러나든 감춰져 있든, 언제나 쾌락이 스며들어 있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죄에 물들게 된다. 반면에 덕은 특히 그 첫 단계에서는 애써 배워 익히고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사람 곁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죄와 덕 사이의 이 기울기 차이가 사람의 발걸음을 죄로 이끄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불안이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것에서 돌아서서 하느님께 귀의하여 그분의 말씀과 계명에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면서도, 모든 감각으로 사물과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 탓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한결같이 믿고 따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성경, 교회의 전례와 가르침, 성인들의 삶과 모범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다고 하지만, 나만을 위한 특별한 계획,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질 만큼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처방이 없으면 영혼에는 불안이 스며든다. 사람을 서서히 송두리째 뒤흔드는 이 불안 앞에서 신앙의 정공법은 공허하게 들리고, 반대로 손쉬운 요령에는 귀가 번쩍 뜨이게 된다.
사주와 운세로 향하는 발걸음
공적·사적 영역을 막론하고 미신이 횡행하는 한국 사회에서, 죄의 달콤함과 미래의 불확실성이 영혼에 주는 불안이 서로 맞물려 가톨릭 신자의 발걸음을 사주와 운세, 각종 점(占)으로 교묘히 이끈다.
진짜냐 아니냐, 사실이냐 눈속임이냐, 경험에 기반한 확률이냐 근거 없는 비약이냐 하는 논의와는 별개로, 이런 사고방식이 한국인의 생활과 정서, 더 나아가 경제 활동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분명하다.
흥미롭게도 과학자나 지식인이 보통 사실이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이런 현상들을, 교회는 단순하게 인간의 정신적 왜곡일 뿐이라고 일축하지 않는다. 성경 역시 “점쟁이와 복술가와 요술사와 주술사, 그리고 주문을 외우는 자와 혼령이나 혼백을 불러 물어보는 자와 죽은 자들에게 문의하는 자”를 찾아가는 일을 “역겨운” 이방 풍습이라고 비판할 뿐(신명 18,10-11 참조),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비웃지는 않는다. 교회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들이나 다른 성인들에게 미래를 계시하실 수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115항)라고 분명히 인정한다.
하느님을 넘 보는 인간의 위험한 욕망
그렇다 하더라도 교회는 “탄생 별자리를 믿는 것, 점성술, 손금, 전조(前兆)와 운명에 대한 해석, 환시 현상, 점쟁이(무당)에게 물어보는 일”(《가톨릭 교회 교리서》 2116항), “신비로운 능력들을 복종시켜 뜻대로 사용하고, 이웃에게 ―비록 이웃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려고 할지라도―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마술이나 요술 행위”(《가톨릭 교회 교리서》 2117항)를 불건전한 호기심, 더 나아가 비판받아 마땅한 행위로 여겨 멀리하도록 가르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실제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것처럼 속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감춰진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이런 행위에는 “시간과 역사, 나아가서는 인간까지 지배하는 능력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감추어져 있으며, 신비로운 능력들을 장악하고자 하는 욕망 또한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가 당연히 하느님 한 분께만 드려야 하는, 사랑의 경외심이 포함된 영예와 존경을 거스르는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116항)
첫 인간의 결말로 돌아가는 선택
그러므로 미래의 불안에 맞서 감각적으로 확실한 것을 좇아 사주와 운세, 점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결국 첫 인간이 저지른 범죄의 현장으로 고스란히 돌아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하신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눈이 열려 자신들이 알몸인 것을 알아챌 정도의 알량한 지식을 얻었을 뿐, 하느님과 맺는 영원한 관계의 죽음을 맛보아야 했다. 나무의 열매는 순간 달콤했지만, 그 결과는 일생에 걸쳐 쓰디썼다. 축복을 받으려다 저주에 떨어졌고, 하느님처럼 되려다 먼지로 돌아가고 말았다. 미래를 확실히 알아내고자 하는 시도를 포함하여, 하느님 없이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그들과 똑같은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
미래는 맡기고, 과거는 직면하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먼저, 미래를 아는 일은 인간의 손에 맡겨져 있지 않다는 분명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책임 있는 태도로 앞날을 생각하며 준비하되, “미래와 관련된 모든 것은 신뢰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섭리의 손길에 맡겨 드리고”(《가톨릭 교회 교리서》 2115항)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계명과 맡기신 사명을 충실히 실천하며 하나씩 완수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다.
두 번째로, 미래는 우리 손을 떠나 있지만, 과거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손이 남긴 흔적임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과거를 객관적인 진리의 기준에 비추어 더 확실하고 선명하게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지나온 길, 내가 이룩한 성취와 겪어야 했던 실패, 내가 베푼 선행과 저질렀던 잘못을 어떠한 변명이나 합리화 없이 가려내어 더 나은 삶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때 고해성사는 꼭 필요한 요소이다.
고해성사, 다시 ‘알몸’으로 서는 일
고해성사는, 말하자면, 하느님 앞에 다시 알몸으로 서는 일이다. 사람이 자신의 인생 중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 물으시는 하느님 앞에, 허위의 옷을 전부 벗어 버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를 갈망하며 나아가는 일이다.
세례 준비 과정에서 옛 악습의 옷을 한 번 벗었으나, 자기 자신도 모르게 혹은 자신의 의지로 다시 찾아 입은 그 옷을 과감히 벗어 버릴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괴롭히던 불안의 정체를 꿰뚫어 볼 수 있다. 인간의 모든 불안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을 따르지 않은 채 하느님처럼 되기를 혹은 하느님에게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런 욕망이 불안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자신이 딛고 선 발판을 스스로 걷어차 버리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라는 확실하고 영원한 고향이 없다면, 인간은 정처 없이 떠도는 한낱 먼지일 뿐, 다른 무슨 가치 있는 존재가 되겠는가?
사람 앞에서 옷을 벗는 일이 수치스럽듯, 고해 사제 앞에서 영혼의 맨살을 드러내는 일에도 용기와 어느 정도 부끄러움을 견디는 수고가 필요하다. 고해성사는 죄에 물든 영혼이 하느님께서 몸소 알몸의 첫 인간들에게 만들어 입혀 주셨던 그 가죽옷을 다시 받아 입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렇게 미래를 하느님께 맡기고 과거를 하느님 안에서 돌아볼 때 비로소 우리는 현재를 올바로 인식하고 희망 가운데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오늘의 운세보다 이달의 고해성사가 더 현실적이고 더 가치 있는 처방이다. 그것이 우리를 더 사람답게, 그리고 더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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